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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날아드는 흰개미여, 창작자 고유의 것을 그만 갉아 먹어라

광고를 만드는 일, 한때는 이 일이 과학적 분석과 예술적 표현이 가미된 고도의 창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광고시장이 본격적으로 디지털화되면서 모바일 광고의 점유율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광고매출은 2021년 22.6%의 놀라는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전체 산업 매출의 32.2%를 차지했으며, 2026년에는 모바일 광고 매출이 전제 광고의 7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렇게 기대되는 광고시장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유독 힘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모바일 콘텐츠 제작 디자이너들이다.

부를 하라, 소비자를 생각하라, 그리고 디자인을 하라

광고 제작자들이 소비자의 욕구를 예측하고, 알아보고, 고민해서 제작 방향을 잡는 인사이트 전략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식의 기획, 아이디어 발상은 필요 없게 되었다. 광고 회사도 크리에이티브 보다 미디어 퍼포먼스에 더 집중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다양한 모바일 채널 안에서 소비자들이 실시간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에 관심이 많으며, 어떤 소통과 솔루션을 원하는지 테스트를 하면서 대응을 해야 하는 게 지금의 미디어 퍼포먼스 전략이다. 그리고 이 일을 지원해야 하는 제작자는 실시간 각각의 미디어에 맞는 콘텐츠를 제작해서 넘겨줘야 한다. 일의 과정이 이렇다 보니 제작자는 생각할 틈도 없고, 노출이 되는 광고 사이즈가 너무 작다 보니 창의적인 비주얼을 만들 수가 없다. 결국 열심히 생각하는 대신 열심히 챙기고, 잘 만드는 대신 있는 소재를 잘 편집하는 일이 제작자의 일이 되어버렸다.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

광고 제작자라면 누구나 독창적이면서도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광고주는 작은 사이즈에 들어갈 이미지에 굳이 제작비를 들일 이유가 없다면서 기존 이미지에 문구만 넣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인피드 광고, 유료 검색 광고로 돈을 벌고 있는 미디어사들은 수익을 더 올리기 위해 조악(刀惡)한 수준의 광고 사이즈를 설정해 두고 그 기준에 맞춰 제작이 되도록 심사를 하고 있으며, 미디어 운영자는 수십개의 미디어를 세팅하고 실시간 반응을 체크해서 반응이 없으면 다른 콘텐츠로 업로드 해야 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B안을 찾는다. 이처럼 제작자에게 좋은(worthy) 것이 아니라 적절한(pertinent)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숫자가 싫다. 사람 이야기가 좋다

그럼 소비자는 어떤가? 요즘 소비자들은 일부러 광고를 보지 않고 흥미로운 것만 읽는다. 이 때문에 미디어에 거액의 광고비를 뿌리면 확실히 임계점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광고를 멈추는 순간 도달률은 다시 떨어진다. 그만큼 소비자들은 자기중심적으로 똑똑해졌고, 광고 선택에 있어서도 냉정해졌다. 내가 아는 마케터는 요즘 매일 매시간 광고비 대비 매출액(ROAS)을 확인하면서 깊은 한숨을 쉰다. "일단 a,b,c 소재를 만들어 노출을 시켜 보죠. 그 중에 클릭률이 높은 소재의 이미지나 문구를 기반으로 다른 소재에도 붙입시다" 다급한 마케터의 심정은 알겠으나 창의적인 것을 욕망하는 제작자에게 이런 작업이 얼마나 하찮은 일이고 실망스러운 일인지 그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더 늘어날수록 창의적인 제작자는 현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미디어 전쟁에서 굳이 숫자에 미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열정을 허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론하긴 싫지만 정말 돈이 안 되는 일이다.

부당하고 불분명하고 불쾌하고 불필요하다

얼마 전 직원에게 "우리 쪽팔리게 만들지 말자. 네가 만든 제작물에 너의 이름이 평생 남아 있어"라고 호통을 쳤다. 크리에이티브 열정이 굳이 필요 없는 일, 여러 미디어의 조악(刀惡)한 조건에 맞춰야 하는 일, 결국 우리를 들어내지 못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라는 나를 보면서 그 직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직원들은 쉽고 편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날로 심해지는 디지털 미디어사의 횡포가 문제지 미디어 시장의 변화 속 패턴을 읽어내기에 급급한 제작자들이 무슨 잘못인가. "수도 없이 날아드는 흰개미여, 창작자 고유의 것을 그만 갉아 먹어라"
최근 신세계백화점 '모바일 선물 기획전' 광고를 타사와 경합을 통해 따오고 진행했다. 진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항은 있었으나 비주얼 느낌, 서체 하나 조차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광고주를 만나서 오히려 창작 열의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바일 미디어사의 조악(刀惡)한 규정 때문에 광고 이미지가 실망스럽게 보였다.
글, Setphen